‘화개 장터’, 100년 전엔 강 건너에 위치

관광객이 찾는 지금의 화개장터에는 시장임을 알리는 표석도 있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 아랫말 하동사람 윗마을 구례사람…’
노랫말 가사로 유명해진 경남 하동
‘화개장터’.
100년 전 이곳에서도 ‘독립만세’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1919년 4월6일 장날 저녁 무렵, 시장에 모인 300여 명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만세 시위를 벌였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당시 시위가 벌어진 화개장터의 위치는 지금과 달랐다.
1920년대 만든 옛 지도에는 화개장(花開場)이라는 표식이 하천 윗쪽에 표시돼 있다. 국토정보지리원 및 네이버 위성지도
당시 사용된 지도를 보면 ‘화개장’이라는 글자와 ‘시장’임을 알리는 표시가 하천 건너편에 적혀 있음을 알 수 있다. 현 시외버스터미널 부근이다. 옛 화개장터는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쇠퇴하였고, 가수 ‘조영남’ 씨의 노래가 유행한 이후 지금의 자리에 상설 시장이 자리 잡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 이전으로 지명이 옮겨가기도
서울역 광장에 가면 애국지사 한 분의 동상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로 ‘강우규’ 의사다. 3.1운동이 끝날 무렵인 9월 2일, 강 의사는 서울역 앞에서 마차에 오르는 신임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향해 폭탄을 던졌다가 미수에 그쳤다. 보름 만에 체포된 강 의사는 이듬해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서울역 광장에 위치한 강우규 의사의 동상
이곳은 또한 3.1운동의 주요 시위지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1919년 3월 5일, 경성 지역 학생들을 중심으로 수많은 군중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당시 ‘조선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이 나부꼈고, 붉은 완장을 찬 학생들의 ‘만세’ 소리가 서울 전역에 울려 퍼졌다고 한다. 이 시위 이후 일제는 독립만세 시위를 벌인 학생과 일반인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해 이후 서울 중심부에서는 큰 시위가 일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강 의사가 의거를 일으키고, 서울의 학생들이 대대적인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던 서울역 앞은 지금의 서울역 광장이 아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서울역 건물은 1920년대에 들어와 ‘경성역’ 이름으로 건설됐다. 1919년 만세 시위 당시 서울역은 ‘남대문역’이었고 염천교 근처에 있었다고 한다. 현 서울역 구청사와 염천교 사이 중간쯤이다.
일제 탄압의 상징 ‘종로경찰서’도 위치 달라


옛 지도에 표시된 종로 경찰서 위치와 1919년 당시 종로경찰서와 YMCA 모습. 출처: 아시아역사자료센터, 서울역사아카이브
기미년 독립만세 시위 둘째 날인 3월 2일, 서울의 시위대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의 상징인 종로경찰서로 향했다. 낮 12시부터 4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이다 20여 명이
체포됐다. 당시 시위대가 둘러싼 종로경찰서는 지금 안국역 앞 종로경찰서가 아닌 종로대로 쪽에 있었다. 1905년 일본 조선헌병대사령부가 사용했던 지도를 보면 현 종로2가에
‘종로경찰서’와 ‘YMCA(중앙기독청년회)’가 표시돼 있다.
1923년에는 김상옥 의사가 이곳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뒤 일제 경찰과 헌병에 쫓기다 총격전을 벌이는 도중 자결하여 순국한 역사가 배인 곳이기도 하다.
수몰된 3.1운동 시위지
댐 건설로 3.1운동 만세 시위 장소가 물속으로 잠긴 곳도 많다. 경북 안동 지역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안동댐의 건설로 3월 22일과 23일 일어났던 ‘임북면사무소 앞 시위’와 ‘동후면사무소 시위’ 장소가 수몰된 상태다.
안동댐 건설로 수몰된 동후면 면사무소(절강동)와 임북면 면사무소(사월동) 소재지. 옛 지도에서 ‘O’표시는 일제 강점기 면사무소 자리를 의미한다.
출처 : 국토지리정보원
북한의 유명한 댐인 ‘수풍댐’은 인근 창성읍 만세 시위지를 물속으로 잠기게 했다. 1919년 4월1일 창성읍 서문 밖에는 주민 2천여 명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행진을 벌이다 일본 군인들의 습격을 받아 2명이 현장에서 순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0년대 말 수풍댐이 건설되면서 평안북도 창성군의 중심인 창성읍 전체가 수몰됐다. 국토지리정보원 및 네이버위성지도
분단으로 인한 지명 변경
남북이 분단되면서 시설이 사라지거나 옮기면서 지명이 바뀐 곳도 있다. 3월10일과 11일 이틀 연속 철원에서는 군청 앞과 역 앞에 수백 명의 주민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기록에 의하면 군청 앞 시위에서는 시위대가 일제가 임명한 군수를 끌고나와 강제로 ‘만세’를 부르게 했다고 한다.

전쟁과 분단으로 사라진 옛 철원군청과 철원역. 국토지리정보원 및 ESRI 위성지도
당시 철원군청은 그러나 현재 군 청사와 다른 곳에 있었다. 지금의 철원군청에서 북서쪽으로 15km나 떨어진 현 철원군 중리에 군청이 있었다. 당시엔 그 곳이 철원 읍내였다. 지금은 철길과 역사가 사라졌지만 철원역은 구 철원읍에서 다시 북으로 4km 떨어진 현재의 휴전선 바로 아래에 있었다. 남북 분단의 영향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