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1일 독립선언과 운동을 기획하고 준비한 민족대표 33인은 애초 독립선언식 장소였던 파고다(탑골) 공원 대신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그 시각 파고다 공원에는 학생들을 주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오후 2시가 지나자 팔각정 안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군중은 박수와 만세로 화답했다. 민족 대표들이 태화관에 있었는데 그렇다면 누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을까?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일반적인 얘기는 경신학교를 졸업한 정재용(鄭在鎔)이라는 분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는 것이다. 정재용 선생은 해방된 지 10년쯤 지난 1956년, 한 일간지에 3월1일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글을 올린 이후 수차례 같은 주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바 있다.

정재용 선생

하지만 이를 입증할 분명한 물증이나 객관적 자료는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다보니 1965년에는 파고다 공원 만세 운동에 참석했던 일부 애국지사들이 다른 일간지와 인터뷰를 통해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다.

1965.3.1. 경향신문 ‘3.1운동사에 이설 나타나
— 독립선언문 누가 읽었나?’

이 기사에 의하면 일부 독립운동가들이 주장하는 파고다 공원 독립선언서 낭독자의 모습은 ‘5척 2~3촌’ 즉, 160cm 안팎의 키에 수염이 텁수룩한 5,60대 노인이라는 것이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도 이러한 논란이 일자 독립선언서 낭독에 대해 재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에 대한 명확한 결론은 내려지지 않고 있다. 여전히 지금도 많은 책과 글에는 정재용 옹이 파고다공원 독립선언서 낭독자로 등장한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3.1절 무렵 또 다른 주장이 제기됐다. 파고다공원 독립선언서 낭독자가 정재용이 아닌 다른 학생이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었다. 특히 경성의전 재학생 대표로 당시 서울 3.1운동 만세 시위를 주도한 ‘한위건’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 근거 중에 하나는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 선생이 생전에 구술한 자료다. 재미 교수인 이정식 교수가 1966년 김성숙 선생을 인터뷰 했다.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39쪽.

한위건은 3.1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 상해 임시정부에서 내무위원을 지냈고, 이후엔 조선공산당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다 1937년 사망했다.

정재용과 텁수룩한 수염의 노인, 그리고 한위건까지...

100년 전 민족 자립을 갈망하는 군중 앞에 우렁차게 독립을 선언한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검찰이 재판부에 보낸 의견서, 1919.8.30.

당시 서울의 만세 시위자들을 체포하고 조사한 일제 군경과 검찰도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사람을 밝혀내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재판부에 보낸 의견서에 '성명불상자'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고 기술했다.

KBS 데이터저널리즘팀은 파고다 공원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인물에 대한 보다 객관적이고 자세한 정보를 찾기 위해 당시 일본 군경과 검찰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은 이들의 심문조서를 훑어보았다.

그 결과 3월1일 오후 파고다 공원 팔각정(육각정) 안에서 독립선언서를 읽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라도 본 사람은 수십 명에 이르렀고, 십 여 명은 낭독한 인물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인상착의를 구술했음을 확인했다.

▪ 도상봉(都相鳳) 신문조서
“육각당에서 성명 미상의 35·6세 가량의 한복차림을 한 조선사람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러자 많은 군중이 박수를 치거나 만세를 불렀다.”

▪오택언(吳澤彥) 신문조서
“아래 위에 수염이 있는 머리를 깎은 마른 흰 얼굴의 30 몇세의 백색 한복을 입은 남자가 선언서를 낭독하고...”

▪ 유극로(俞極老) 신문조서
“육각당 위에서 30세쯤 되고 두루마기를 입은 조선인이 선언서를 낭독하고...”

▪ 박쾌인(朴快仁) 신문조서
“육각당 위에서 중절모자를 쓴 자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 김봉렬(金鳳烈) 신문조서
“40세 가량의 키가 별로 크지 않은 곰보 얼굴의 중절모자를 쓴 자가 육각당 위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 고재완(高在琓) 신문조서
“이름은 모르겠으나 34·5세의 키가 작고 낯에 검은 점이 있는 남자였다. 뚱뚱하거나 야윈 편도 아닌 보통 체격의 남자였다.”

▪ 신봉조(辛鳳祚) 신문조서
“육각당 안에 두루마기를 입은 菊石(암모조개) 얼굴의 남자가 독립의 선언서를 읽고 있는데 일동이 문 밖에 넘치었다.”

▪ 김백평(金栢枰) 신문조서
“그 공원 안 6각탑이 있는 곳에서 어느 40세 정도 되는 단발한 조선인이 선언서를 읽고 만세를 외쳤다.”

▪ 이인식(李仁植) 신문조서
“군중에 가담하여 남대문 쪽으로 갈 때 중앙학교 학생이 나에게 일본 유학생이 (파고다 공원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연설을 했다고 말했었다.”

▪ 김원벽(金元壁) 신문조서
"나는 그 곳에 가지 않았으므로 모르겠는데, 자동차를 타고 온 일본 유학생이 낭독했었다는 것을 들었다.”

위 진술들을 종합해보면 당시 파고다공원 육각정 안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은 인물은 ‘30세~40 세 사이의 흰색 두루마기를 입고 중절모를 썼으며, 얼굴에는 곰보 자국이나 검은 점 등이 보이고,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보통 체격의 키가 크지 않은 일본 유학생’으로 요약된다. 이를 앞서 제기된 ‘독립선언서’ 낭독자 유력 인물들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당초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예정된 인물은 연희전문학교의 대표를 맡았던 ‘김원벽’이라는 진술도 존재한다. 하지만 김원벽은 일제 경찰이 작성한 진술 조서에서 당시 파고다 공원에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어쩌면 독립선언서 낭독자로 판명됐을 경우 일제로부터 심한 탄압과 고초를 겪을 것이 분명해 어쩌면 체포된 시위 참여자들이 일부러 낭독자를 모른다고 입을 모았을 가능성도 있다.
3월1일 동시에 독립선언식을 치른 평양과 의주의 경우엔 각각 정일선과 유여대가 독립선언서를 읽었다는 당시 일제 강점기 판결문과 진술 조서가 존재한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는 3월1일 파고다 공원 독립선언서 낭독자로 특정 인물을 단정하고 있지 않다.